대한제국·일제강점기
1897 ~ 1945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으로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려 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국권을 완전히 피탈당해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경제를 수탈했지만,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전 민족적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만주의 무장독립투쟁과 국내외 다양한 독립운동이 광복 때까지 이어졌다.
주요 사건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압력 아래 추진된 갑오개혁은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조혼 금지, 연좌제 폐지 등 전근대적 제도를 없애는 근대적 개혁이었다.
수능 포인트 갑오개혁으로 폐지된 것(신분제·과거제·조혼·연좌제)과 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의 개혁 요구를 혼동하지 않도록 구분해야 한다.
일본은 친러 정책을 펴던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뒤이어 단발령까지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유생과 백성들이 각지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수능 포인트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단발령이 최초의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 봉기로 이어졌다는 인과관계를 기억해야 한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이 시기 열강의 이권 침탈이 크게 심화되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해 만민공동회를 통해 자주 국권·자유 민권 운동을 펼쳤다. 독립협회는 헌의6조를 채택해 의회 설립을 요구했으나 고종과 보수 세력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수능 포인트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헌의6조(의회 설립 요구)는 자유 민권 운동의 대표 사례로, 결국 고종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는 결말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후 광무개혁을 통해 군사·산업·교육 분야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열강의 간섭 속에 한계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민영환 등이 이에 항거해 순국했고, 각지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수능 포인트 을사늑약(1905, 외교권 박탈)과 한일병합조약(1910, 국권 피탈)의 시기·내용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조약 체결에 서명한 을사오적(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두면 좋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해 행정권을 장악했으며 군대를 해산시켰다.
수능 포인트 헤이그 특사(이준·이상설·이위종) 파견 실패 → 고종 강제 퇴위 → 정미7조약·군대 해산 → 정미의병 확산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을사늑약을 주도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재판을 받으며 자신을 전쟁 포로라 주장했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순국했다.
수능 포인트 안중근(하얼빈,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과 이봉창(도쿄, 1932)·윤봉길(상하이 훙커우, 1932)의 의거를 시기·장소·대상 인물별로 구분해 암기해야 한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고, 헌병 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가 시행되었다.
일제는 근대적 토지 소유 확립을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을 벌였으나, 신고주의의 허점과 절차의 어려움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를 통해 막대한 토지를 확보했다.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과 민중이 참여했고, 일제는 무력으로 잔인하게 탄압했다(제암리 학살 등).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수능 포인트 3·1운동(1919.3)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4)의 인과 관계는 매우 자주 출제된다. 3·1운동이 통합된 지도부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그 결과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흐름을 반드시 기억하자.
3·1운동을 계기로 여러 지역의 임시정부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연통제·교통국 운영, 외교 활동, 독립신문 발간 등 다방면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수능 포인트 임시정부의 체제(삼권분립, 민주공화제)와 활동(연통제, 교통국, 구미위원부)을 구분해 암기해야 한다.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은 봉오동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연합 부대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는 만주 무장독립투쟁 중 가장 큰 승리로 꼽힌다.
수능 포인트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했다는 점을 뒤바꾸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 다 1920년에 일어났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자.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해 결성한 최대 규모의 민족 협동 전선 단체로, 전국에 지회를 두고 강연회·계몽 활동 등을 벌였다.
수능 포인트 신간회(1927~1931)는 좌우 합작(비타협적 민족주의+사회주의) 단체라는 점,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원 활동을 했다는 점이 자주 출제된다.
광주에서 한·일 학생 간 충돌을 계기로 시작된 시위는 전국적인 항일 학생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지원했으며, 이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평가된다.
수능 포인트 광주학생항일운동(1929)과 신간회의 진상 조사단 파견을 연결지어 기억하고, 3·1운동(1919)과 혼동하지 않도록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
일제는 만주사변·중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삼고, 황국신민화 정책·창씨개명·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또한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수많은 조선인을 징용·징병으로 끌고 갔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같은 반인권적 강제동원도 자행되었다.
수능 포인트 일제 통치 방식은 1기 무단통치(1910년대, 헌병경찰·태형·회사령)→2기 문화통치(1920년대, 3·1운동 이후 보통경찰제·친일파 양성이라는 기만적 회유책)→3기 민족말살통치(1930~40년대, 황국신민화·창씨개명·강제동원)의 3단계로 구분되며, 각 시기의 특징을 뒤섞어 출제하는 경우가 많으니 순서와 핵심 정책을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고,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축하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고위 인사들을 살상했다. 두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능 포인트 이봉창(도쿄, 일왕 행렬)과 윤봉길(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군 전승 축하식)의 장소와 대상을 뒤바꿔 출제하는 경우가 많으니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휘 아래 체계를 갖췄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대일 선전포고를 했으며, 미국 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수능 포인트 한국광복군의 대일 선전포고(1941), 미얀마·인도 전선 파견, OSS와 함께 준비한 국내 진공 작전이 실행 전에 광복을 맞았다는 사실을 순서대로 기억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준비하던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실행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고, 이후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수능 포인트 광복이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이루어졌다는 점, 그로 인해 자주적 정부 수립에 어려움을 겪고 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좋았던 점
- · 독립신문 등 근대 신문이 창간되어 새로운 소식과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 · 근대식 학교가 세워지며 신학문과 한글 교육의 기회가 늘어났다
- ·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독립의 희망을 키웠다
- ·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서 동포 사회가 형성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힘들었던 점
- ·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농민이 크게 늘었다
- · 산미증식계획으로 생산한 쌀 대부분을 일본으로 반출당해 정작 조선인은 만주산 잡곡으로 끼니를 이었다
- · 창씨개명과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우리말과 우리 이름, 문화를 강제로 빼앗겼다
- · 강제 징용·징병과 일본군 '위안부' 동원 등 인권을 짓밟는 강제 동원이 자행되었다
- · 헌병 경찰의 감시와 태형 등 폭력적 통치 아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어려웠다
알아두면 좋은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절 셋방을 전전할 만큼 살림이 어려웠지만, 김구 선생은 청년들과 함께 만두를 빚어 팔거나 삯바느질감을 받아 생계를 이으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