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918 ~ 1392
918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며 고려를 세웠다. 초기에는 문벌귀족이 정치를 주도했으나, 1170년 무신정변으로 무신정권이 100년간 이어졌다. 이후 몽골(원)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며 오래 저항했고, 결국 원 간섭기를 겪었다. 고려 말에는 공민왕의 개혁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으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주요 사건
대표적 문벌귀족 이자겸은 왕실과 거듭 혼인 관계를 맺으며 권력을 독점하다가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1126). 이후 묘청은 풍수지리를 근거로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을 주장하며 문벌귀족 세력에 반발했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었다(1135).
김부식은 인종의 명을 받아 기전체 형식으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삼국사기(1145)를 편찬했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서술되었으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로 평가된다.
수능 포인트 삼국사기(1145, 김부식, 유교적·기전체)와 삼국유사(1281, 일연, 불교적·설화 중심)는 편찬자·시기·사관을 짝지어 비교하는 문항이 매년 출제되니 함께 암기해야 한다.
문신 위주 정치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최씨 정권을 포함해 약 100년간 무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무신정권 시대가 이어졌다.
문종의 아들이었던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아우르려 천태종을 창시했고(11세기 말), 지눌은 참선 수행을 중시하는 조계종을 열어 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했다(12세기 말~13세기 초). 지눌은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장하며 수선사 결사 운동을 이끌었다.
몽골이 1231년부터 여러 차례 고려를 침입하자,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해 30년 가까이 항전했다. 그동안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결국 고려는 몽골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몽골과의 강화와 개경 환도에 반발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봉기해 진도, 이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대몽 항쟁을 이어갔으나 결국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일연은 원 간섭기인 1281년 삼국유사를 편찬해 단군 신화를 비롯한 고조선의 역사와 불교 설화, 향가 등을 수록했다. 삼국사기와 달리 불교적·설화적 성격이 강하고 자주적 역사의식이 돋보인다.
공민왕은 몽골식 풍습을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 땅을 되찾는 등 반원 자주 개혁을 추진했다. 신돈을 등용해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신진사대부를 성장시켰다.
수능 포인트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은 ①쌍성총관부 수복(철령 이북) ②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③기철 등 친원파 제거 ④몽골풍 금지의 네 가지로 정리해 암기한다. 신돈이 주도한 전민변정도감은 권문세족의 불법 토지·노비를 정리하려 했으나 신돈이 실각하며 성과가 제한적이었다는 점, 그럼에도 이 시기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이후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된다는 흐름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을 연구해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했고, 이곳에서 만든 화포로 진포대첩(1380)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했다.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화상의 저술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1377)이 간행되었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1455년경)보다 78년 앞선,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수능 포인트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이보다 앞선 금속활자 인쇄 기록인 상정고금예문(1234)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 인쇄지가 개경이 아닌 청주 흥덕사라는 점이 함정으로 자주 출제된다.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88)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신진사대부와 손잡고 전제 개혁(과전법, 1391)을 단행했다. 결국 1392년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수능 포인트 위화도 회군(1388) → 과전법 실시(1391) → 정몽주 등 온건파 제거 → 조선 건국(1392)의 순서와, 이 과정에서 급진파(정도전)·온건파(정몽주) 신진사대부의 노선 차이를 구분하는 문항이 자주 출제된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개경(개성)을 도읍으로 삼아 고려를 건국했다. 이후 신라 항복과 후백제 정복으로 후삼국을 통일했다.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자진 항복했고, 이듬해인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해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신라 천 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한반도는 다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광종은 불법으로 노비가 된 양인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956)을 실시해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958)를 도입해 능력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했다. 관복 제정과 황제 칭호·독자 연호 사용도 함께 이루어져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수능 포인트 노비안검법은 호족의 경제적 기반(불법 노비) 약화가 핵심이고, 과거제는 문신 관료 중심 사회로의 전환점이다. 두 정책 모두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묶어 출제되며, 실행 연도(956/958) 선후 관계를 구분하는 문제가 자주 나온다.
경종 때 시작된 전시과는 관리에게 관등에 따라 토지(전지)와 땔감을 얻을 땅(시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하고, 죽거나 관직을 잃으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한 토지 제도다. 성종 때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2성), 그 아래 이·병·호·형·예·공부(6부)로 이루어진 중앙 정치 조직을 정비했고, 귀족 합의 기구인 도병마사·식목도감을 운영했다. 또한 가문 배경으로 관직에 오르는 음서제가 과거제와 함께 시행되어 문벌귀족의 지위를 뒷받침했다.
수능 포인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중서문하성)과 추밀(중추원)이 합의하는 고려 고유의 귀족 합의 기구로,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통합·개편되어 권문세족의 권력 기반이 된다. 전시과(고려, 수조권 지급·현직 복무 대가)와 과전법(1391, 공양왕 때 경기 지역에 한정해 지급)의 차이는 고려-조선 전환기 토지 제도 문제에서 반드시 비교 출제된다.
거란(요)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다. 1차 침입 때 서희는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했고, 3차 침입 때 강감찬은 귀주대첩(1019)에서 대승을 거두어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
좋았던 점
- · 벽란도를 중심으로 송·아라비아 상인까지 오가는 활발한 국제 무역이 이루어져 개경은 국제도시로 번성했다
- · 불교가 국가적으로 존중받아 절에서 축제(연등회·팔관회)를 즐기고 문화적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 · 고려청자 같은 뛰어난 공예 기술이 발달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를 이루었다
- · 과거제를 통해 능력만 있으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 여지가 있었다
힘들었던 점
- · 몽골과의 약 30년에 걸친 전쟁으로 강화도로 피난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 · 무신정권 100년 동안 왕은 힘을 잃고 백성들은 계속된 권력 다툼의 피해를 입었다
- · 고려 말에는 왜구와 홍건적의 이중 침략(14세기)으로 해안과 내륙 모두 큰 피해를 겪었다
- · 권문세족의 대농장 확대로 힘없는 농민들은 땅을 잃고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아두면 좋은 사실
고려(Goryeo)라는 이름이 오늘날 영어 국가명 'Korea'의 어원이 되었는데, 이는 벽란도를 드나들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세계에 알리면서 굳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