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고조선
~ BC 108
선사 시대는 문자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로,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거친다. 이 시기 사람들은 돌과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었고,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며 정착 생활을 하였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워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가 등장하였다.
주요 사건
3~4세기 부여는 선비족의 침입(285)과 전연(前燕)의 침략(346)을 잇달아 겪으며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이후 점차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수능 포인트 부여는 선비족(285)·전연(346)의 침략으로 쇠퇴한 뒤 고구려에 예속되었다가 결국 병합(494)되었다는 쇠퇴~멸망의 순서를 기억할 것
여러 차례의 침략으로 쇠약해진 부여는 494년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능 포인트 부여 멸망(494) → 고구려에 완전 병합. 부여 계통 유이민 세력이 고구려·백제 지배층 형성에 영향을 준 계승 관계를 파악해 둘 것
고조선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8조법을 시행하였는데, 현재는 그중 3개 조항만 『한서』 지리지를 통해 전해진다. 이후 한(漢)과의 전쟁에서 왕검성이 함락되며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수능 포인트 8조법은 3개 조항만 전해짐 — '전해지는 조항 수'와 '조항 내용(사형/곡물 배상/노비화)'이 선지로 자주 활용됨. 한사군(낙랑·임둔·진번·현도) 중 낙랑군만 AD 313년까지 오래 유지되었고 나머지 3군은 단기간에 소멸했다는 점도 함께 출제됨
중국 연(燕)나라 출신 유이민 집단을 이끌고 온 위만은 준왕에게 의탁했다가 세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한과 한반도 남부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수능 포인트 위만의 출신(중국인설 vs 조선인설) 논쟁 — 상투·조선 옷 착용, '조선' 국호 유지가 조선(계)인설의 근거로 출제됨. 위만조선의 철기 수용과 중계 무역 독점이 한(漢)과의 갈등·전쟁 원인이 되었다는 인과관계도 함께 기억할 것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전해진다. 단군 신화는 환웅과 웅녀의 결합, 홍익인간 이념 등을 통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제정일치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능 포인트 단군 신화 속 '홍익인간', '제정일치(단군왕검=제사장+정치지배자)' 키워드는 자주 출제됨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 만주 길림(지린) 일대의 송화강 유역에서 부여가 성장하였다. 부여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라는 네 명의 대가(大加)가 각각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리는 연맹 왕국이었으며, 훗날 고구려·백제 건국 세력의 뿌리가 되었다.
수능 포인트 부여의 4출도(마가·우가·저가·구가)는 왕권이 아직 강하지 않은 초기 연맹 왕국의 증거로 자주 출제됨. 고구려(주몽)·백제(온조) 건국 세력이 부여 계통이라는 계승 관계도 함께 기억할 것
한반도에서 구석기 문화가 시작되어 사람들은 뗀석기를 사용해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하였다. 동굴이나 막집에서 무리 지어 이동 생활을 하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고,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정착 생활이 이루어졌다.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수능 포인트 빗살무늬토기 = 신석기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 유물로 자주 출제됨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으로 무기와 제사용 도구를 만들었고, 벼농사가 확대되며 생산량이 늘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고, 군장이 다스리는 사회가 나타났다.
수능 포인트 청동기 = 지배층 전용(제사·무기), 농기구는 여전히 간석기(반달돌칼) — 청동기 도구와 농기구 재질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좋았던 점
- · 여럿이 함께 모여 살아 외롭지 않고 서로 도울 수 있었다
- ·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냥에만 의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 · 정착 생활로 움집이라는 어엿한 보금자리가 생겼다
- · 청동기 도구 덕분에 제사와 의식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 · 부여에서는 매년 12월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열어 하늘에 감사드리고, 이때는 죄수도 풀어주며 온 나라가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래했다
힘들었던 점
- · 질병에 걸리면 손쓸 방법이 거의 없었다
- · 추운 겨울과 자연재해를 견디기 어려웠다
- · 다른 부족의 침략으로 목숨과 재산을 잃을 위험이 컸다
- · 농사가 흉년이 들면 온 마을이 굶주려야 했다
- · 계급이 생기면서 노비가 된 사람들은 자유 없이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 · 부여의 1책 12법은 도둑질하면 훔친 물건의 12배로 갚아야 할 만큼 엄격했고, 왕이 죽으면 노비를 함께 묻는 순장 풍습까지 있어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늘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알아두면 좋은 사실
빗살무늬토기의 뾰족한 밑바닥은 강가나 바닷가의 모래땅에 꽂아 세우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물가에서 생활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