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발해
668 ~ 935
신라는 나당연합으로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당나라 군대를 매소성·기벌포 전투에서 격퇴하여 676년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이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698년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남북국시대가 성립되었고,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주요 사건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 군사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뒤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시키며 백제가 멸망했고, 이후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의 분열을 틈타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가 멸망했다.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하자 신라는 매소성 전투(675)에서 당의 육군을, 기벌포 전투(676)에서 당의 수군을 크게 격파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당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수능 포인트 나당연합(648) → 백제 멸망(660) → 고구려 멸망(668) → 나당전쟁 → 매소성 전투(675) → 기벌포 전투(676) 삼국통일 완성의 순서를 반드시 암기해야 한다. 특히 '매소성 전투가 먼저, 기벌포 전투가 나중'이라는 순서와 통일 연도(676)를 묻는 문제가 자주 출제된다. 대동강 이남까지만 통일했다는 '불완전한 통일' 한계도 함께 기억할 것.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통일 이후 지방 제도와 군사 조직을 정비해 통일신라 체제의 기틀을 다졌으며,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안장되었다.
신문왕은 682년 국학을 설립해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을 마련했다. 이는 진골 귀족의 힘을 견제하고 왕권을 뒷받침할 인재를 기르려는 목적이었다.
수능 포인트 신문왕의 국학(682) 설립은 관료전 지급·녹읍 폐지(687)와 함께 신문왕대 왕권 강화 정책으로 묶어 출제된다. 국학에서 가르친 9경 3사, 이후 원성왕대 독서삼품과(788)로 이어지는 유교 교육 강화의 흐름을 기억할 것.
신문왕은 687년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던 녹읍을 폐지했다. 녹읍은 토지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농민의 노동력까지 부릴 수 있었기에, 이를 없앤 것은 진골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다.
수능 포인트 '녹읍 폐지(신문왕, 687) → 녹읍 부활(경덕왕, 757)'의 순서와 주체 왕을 바꿔 출제하는 문제가 매우 자주 나온다. 녹읍은 토지+노동력 수취, 관료전은 토지(수조권)만 지급한다는 차이도 함께 기억할 것.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698년 동모산 부근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함께 아울러 국가를 운영했다.
수능 포인트 발해의 건국자는 대조영이며, 건국 연도(698)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한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자주 함께 출제된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발해고』)이라는 점, 그리고 '발해 지배층=모두 고구려 유민'이라는 서술은 함정(실제로는 말갈족이 다수)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할 것.
성덕왕은 722년 일반 백성(정남)에게 정전을 지급해 국가가 토지를 매개로 농민을 직접 파악하고 세금을 걷는 체제를 강화했다.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석굴암과 불국사 창건을 시작했다. 이 시기 통일신라 불교 문화와 건축·조각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수능 포인트 석굴암·불국사는 경덕왕 대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조성이 시작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함께 등재되었다는 점이 자주 출제된다.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려 제작을 시작해 혜공왕 때인 771년 완성한 범종으로, 통일신라 금속 공예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골품제 아래 6두품은 학문과 능력이 뛰어나도 관등 승진에 제한이 있어 불만이 컸으며, 이는 신라 하대 사회 혼란의 배경이 되었다.
원성왕은 788년 국학 학생들의 유교 경전 이해 수준을 시험해 상·중·하품으로 나누어 관리 선발에 참고하는 독서삼품과를 시행했다. 능력 중심 인재 등용을 시도했다는 의의가 있지만 골품제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수능 포인트 독서삼품과는 '유교 경전 시험을 통한 관리 선발 시도'라는 취지와 '골품제의 벽에 막혀 실효성이 미미했다'는 한계를 함께 묻는 문제가 자주 나온다. 시행 왕(원성왕)과 연도(788)를 정확히 암기할 것.
발해는 선왕(재위 818~830) 때 최대 영역을 확보하고 5경 15부 62주 체제를 완성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번영했다.
수능 포인트 '해동성국'은 발해 선왕(818~830) 때 최대 영역을 확보한 전성기에 당이 붙인 별칭이라는 점이 자주 출제된다. 발해의 전성기(선왕)와 신라 하대의 혼란기가 시기적으로 겹친다는 점도 비교 문제로 종종 나온다.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데 불만을 품고 822년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는 신라 하대 진골 귀족 간 왕위 다툼이 본격화되는 신호탄이었다.
장보고는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당·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해상 무역을 주도하며 '해상왕'으로 불렸다.
진성여왕 때인 889년, 사벌주(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가혹한 세금 징수에 반발해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잇따라 일어나며 신라 왕조의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수능 포인트 원종·애노의 난(889, 진성여왕)은 신라 하대 농민 봉기의 대표 사례로, 이후 후삼국 성립(견훤의 후백제 900, 궁예의 후고구려 901)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함께 출제된다.
문왕은 도읍을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정당성·선조성·중대성으로 이루어진 3성과 그 아래 6부를 갖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수능 포인트 발해의 3성(정당성·선조성·중대성)과 6부(충·인·의·지·예·신부)는 당의 제도를 본뜨면서도 명칭과 운영 방식을 독자적으로 바꾼 점이 출제 포인트다. 지방 제도는 5경 15부 62주이며, 상경 용천부가 당 장안성을 모방한 구조라는 점도 함께 기억할 것.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이후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아우르며 후삼국을 통일해 나갔다.
수능 포인트 고려 건국(918) → 신라 멸망(935, 경순왕 항복) → 후백제 멸망(936)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통일 순서를 정확히 암기할 것.
발해는 926년 거란(요)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발해 멸망 이후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왕건은 이들을 동족으로 받아들여 우대했다.
수능 포인트 발해 멸망(926, 거란/요)과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대광현)은 함께 출제되는 경우가 많다. '발해 멸망 → 고려의 민족 통합 의식(신라+발해 유민 포섭)'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기억할 것.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935년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며 신라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왕건은 경순왕을 극진히 예우하고 딸을 시집보내는 등 신라 유민을 포섭하는 정책을 폈다.
좋았던 점
- · 삼국통일로 오랜 전쟁이 끝나 백성들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 · 장보고의 청해진을 통해 신라·당·일본을 잇는 국제 무역이 활발해져 진귀한 물건을 접할 기회가 늘었다
- ·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하여 석굴암·불국사 같은 뛰어난 건축과 예술이 만들어졌다
- · 촌락문서(민정문서)로 확인되듯 국가가 인구·토지·가축까지 파악해 비교적 체계적으로 조세와 노동력을 관리했다
- ·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문화와 경제가 번성해 북방에서도 안정된 삶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힘들었던 점
- · 골품제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6두품 이하는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 · 촌락문서에 기록될 만큼 세금(조세)·공물·노동력(역) 부담이 촘촘히 관리되어 농민의 부담이 컸다
- · 신라 하대로 갈수록 진골 귀족 간의 왕위 다툼이 잦아지고 지방에서는 도적과 봉기가 늘어 백성들의 삶이 불안정해졌다
- · 발해 백성 중 다수를 차지한 말갈족은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과의 신분적 격차를 겪어야 했다
- · 잦은 자연재해와 흉년에도 조세 부담은 줄지 않아 농민들이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알아두면 좋은 사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문서(민정문서)는 촌락별로 인구 수, 소·말의 수, 뽕나무·잣나무 그루 수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두어, 오늘날 통일신라의 경제와 세금 제도를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